
필자가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때는 지금과 같은 벤처 생태계가 막 형성되고 있을 때였다. 엔젤투자, 엑셀레이터같은 개념도 실리콘밸리에서 넘어와 계약서 쓰는 것부터 공부를 해야 했다. 한번은 엔젤투자 교육을 받는데 강사에게 “모태펀드”가 뭐냐 질문을 했다. 왜 나라에서 돈을 주는지 의아해 했기 때문이다. 투자라는 것은 당연히 성공한 자본가가 전액 자부담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했었다.
한국의 벤처 투자 시장은 정부 주도의 모태펀드와 민간 투자자인 LP(유한책임출자자), 실질적인 투자를 집행하는 VC(벤처캐피털) 및 CVC(기업형 벤처캐피털) 가 맞물려 돌아간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이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정부는 정책 자금을 통해 벤처시장에 잃어도 되는 위험한 투자성의 돈을 공급한다. LP는 투자금을 출자한다. VC는 투자 및 운영을 맡는다. 대기업도 CVC라는 것을 통해 벤처 투자를 진행한다.
정부의 개입, 모태펀드의 역할
한국의 벤처 투자 시장에서 모태펀드는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일종의 우리 세금으로 운영이 되는 펀드라 보면 되겠다. 정부가 직접 출자해 벤처펀드를 조성하는 이 구조는 모험자본이 부족한 시장에서 스타트업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한국벤처투자가 운용한다. 매년 다양한 분야의 펀드를 출자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조성한다. 일정 비율은 제대로만 했다면 돈을 잃어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야말로 벤처스런 투자다.
모태펀드의 특징은 명확하다. 정책적 목적을 가진 투자금이라는 점이다. 단순한 수익 창출이 목적이 아니다. 초기 스타트업 육성, 신기술 투자, 사회적 기업 지원 등 특정 분야의 벤처캐피털을 활성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때문에 일반적인 금융시장에서 자금 유치가 어려운 산업에도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AI, 바이오, 친환경 에너지와 같은 분야가 대표적이다.
LP, 투자의 첫 단추를 꿰다
모태펀드가 정부 주도라면 민간의 LP(유한책임출자자)들은 벤처 시장의 핵심 동력을 제공하는 자본가들이다. 보통은 돈이 많은 기관들이 주체가 된다. 이들은 연기금, 금융기관, 기업, 공제회 등으로 구성된다. 직접 스타트업을 선별해 투자하는 대신 VC 펀드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벤처 시장에 간접 참여한다. 즉 나라에서 돈을 받아 자신들의 돈도 포함해 VC펀드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기업, 중견기업들도 LP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직접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대신 VC 펀드에 출자하면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중요해지면서 사회적 책임 투자(SRI)와 연계해 LP로 참여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투자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다.
VC, 투자의 실질적 실행자
VC(벤처캐피털)는 LP로부터 출자받은 자금을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하는 역할을 한다. 실제 돈을 나눠주는 세부적인 집행을 하는 기관이다. 초기 기업부터 성장 단계 기업까지 투자 범위는 넓다. 투자 이후에는 기업가치를 극대화한 뒤 IPO(기업공개)나 M&A(인수합병) 등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목표다.
한국의 VC 시장은 정부 주도의 모태펀드 덕분에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민간 주도의 펀드들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 투자 시장이 성숙해지면서 국내 스타트업들이 해외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CVC, 대기업이 직접 움직인다
CVC(기업형 벤처캐피털)는 일반 VC와 다른 점이 많다. 재무적 수익보다 사회공헌이나 전략적 투자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은 CVC를 활용해 신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신사업을 발굴하며 스타트업과 협업할 기회를 얻는다.
원래 스타트업 보호를 위해 한국의 대기업들은 벤처캐피털을 운영 못하게 했었다. 이유는 투자를 빌미로 문어발식으로 스타트업들을 인수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면 치고 올라오는 신생 경쟁사들을 모두 없앨 수도 있다. 하지만 몇년전 법이 바뀌었다. 국내 지주회사들도 CVC를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 대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삼성, LG, SK, 현대차, 네이버, 카카오 같은 대기업들은 이미 자체 CVC를 운영 중이다. 한계는 있다. 모기업 사업에 침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에 투자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일반 VC 보다는 수익 창출에 대한 간절함도 적다.
벤처 투자 시장의 미래는?
한국 벤처 생태계는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했다. 모태펀드가 시장을 떠받치고, LP들이 자본을 공급하며, VC가 투자 실행을 맡고, CVC가 전략적 투자를 주도하는 구조가 자리를 잡았다. 특히 AI, 바이오, 친환경 에너지, 우주 산업 같은 미래 기술 분야에서는 여전히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ESG 트렌드와 맞물려 사회적 가치 투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벤처 투자 시장은 단기적인 경기 변동에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혁신과 기술 발전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앞으로도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는 한국형 벤처 투자 모델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