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초반, 내가 다니던 회사는 서초역 인근에 있었다. 당시 그 주변에는 다단계 회사들이 유난히 많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각종 설명회와 세미나로 몰려들었다. 점심시간에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만 들으면 마치 거창한 비즈니스 전략 회의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부풀려진 꿈과 허황된 돈벌이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였다.
시간이 지나며 그런 풍경은 사라진 듯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외형은 더 세련됐고, 디지털화됐으며, 언어는 한층 고급스러워졌다. 그러나 구조는 과거의 다단계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의 공통점은 특정 영어 단어를 집요하게 반복한다는 점이다. “파이프라인 구축”, “오토로 굴린다”, “퍼널 설계”, “머니 메이킹 머신”, “패시브 인컴”, “레버리지”, “J-커브 진입”.
겉보기에는 전문적이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종종 본질을 가리기 위한 화려한 포장에 불과하다. 정말로 그런 구조가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면 굳이 남을 설득하며 떠들 이유가 없다. 그런 정보는 조용히 혼자 쓰는 것이 상식이다.
이들은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물론 영어 용어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마치 신비한 비법처럼 포장해 사람을 현혹하려는 태도다. 그 순간 투자자와 소비자, 그리고 경험이 부족한 예비 창업가들은 쉽게 착시에 빠진다.
스타트업이든 개인 비즈니스든, 결국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력과 지속 가능성이다. 진짜 실력자는 설명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반대로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용어를 남발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불확실함을 감추려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직접 보아온, 일찍 사라진 스타트업 대표들 대부분이 문장마다 영어를 끼워 넣던 사람들이었다.
요즘도 세련된 영어 표현과 그럴듯한 말솜씨로 투자자를 끌어모으려는 모습을 볼 때면 문득 서초역 근처의 그 풍경이 떠오른다. 이제는 경계해야 한다. 말이 요란한 곳일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본질을 확인해야 한다. 스타트업이든 개인이든, 결국 살아남는 것은 유행하는 용어가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