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사회 초년 시절 다니던 회사는 서초역 근처에 있었다. 당시 그 근방에는 다단계 회사들이 많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깔끔한 정장을 입고 각종 설명회와 세미나에 몰려들었다. 점심시간 옆 테이블에서 떠드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언가 진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으나 실상은 부풀려진 꿈과 돈벌이 수법이 오갔던 자리였다.
시간이 지나 그 모습은 자취를 감췄졌지만 형태만 바뀐 채 유사한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겉으로는 더 세련되어 보이지만 그 본질은 과거의 ‘서초역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란한 단어 뒤에 숨은 공허함
이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단어들이 있다. “파이프라인을 구축한다”, “이건 오토로 돌리고 있다”, “퍼널 설계를 통해 전환율을 올린다”, “패시브 인컴 구조가 완성됐다”, “이건 머니메이킹 머신이다”, “레버러지를 써야 한다”, “제이커브 곡선에 진입했다” 등이다.
이러한 ‘요란한 영어 단어’들은 겉보기에 뭔가 있어 보인다. 나도 저런게 있다면 투자를 할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포장일 뿐이다. 듣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사용하는 전문용어다. 진짜 그런게 본인에게 있다면 절대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말이 많은 곳에 진실은 적다
이처럼 ‘용어’가 전략이 되어버린 곳에서는 실체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화려한 말로 무장했지만 실제로 어떤 가치를 만들고 있는지는 모호하다. 복잡한 단어를 많이 사용 하는 사람일 수록 조심해야 한다.
물론 모든 영어 단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마치 신비로운 공식처럼 휘두르며 남을 설득하려는 태도다. 이는 투자자나 소비자, 혹은 젊은 예비 창업가들에게 위험한 착시를 일으킨다.
말보다 내용, 유행보다 실력
스타트업이든 개인 비즈니스든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력과 지속 가능성이다. 오히려 진짜 실력자일수록 설명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말은 때때로 본인의 불확실함을 가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말 잘하는 사람보다 실행하고 검증한 사람이 주목받는 문화가 필요하다. ‘파이프라인’이 아니라 ‘진짜 고객’, ‘패시브 인컴’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매출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포장된 언어보다 본질을 보라
요즘에 보이는 멋진 영어 단어와 세련된 말솜씨로 투자자를 끌어 모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서초역의 그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미 많은 유사 사례를 겪어왔다. 똑같은 언어로 똑같은 꿈을 팔던 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허탈함만이 남았다. 이제는 경계해야 한다. 말이 요란한 곳일수록 한 걸음 더 떨어져 그 안의 본질을 들여다보자. 스타트업이든 개인이든 결국 살아남는 건 유행어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