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런던에 방문했을 보았던 처칠 동상은 참 인상적이었다. 이유는 동상이 늠름한 모습이 아니라 지팡이를 지고 구부정하게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당히 서 있는 모습 대신 약간 굽은 자세와 지팡이를 통해 처칠의 인간적인 고뇌와 동시에 불굴의 기개를 함께 담아내었다고 한다. 지팡이에 의지한 모습은 단순한 노쇠함이 아니라 고난을 짊어지고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 지도자의 상징인 것이다.
실패자 처칠
실제 처칠의 초기 시절만 단편적으로 본다면 그는 실패자처럼 보이기 쉽다. 젊은 시절 보어 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여했을 때는 포로로 잡히기도 했고 정치인으로서는 여러 차례 당적을 옮겨 다니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해군 장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을 때도 그가 주도한 전투는 주력 전함 다수가 침몰하고 패배로 끝났다. 영국 해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그는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모습만 본다면 그의 인생은 좌절과 실패의 연속처럼 보일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그러나 처칠은 이러한 위기를 모두 극복했다. 포로가 되었던 젊은 시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극적으로 탈출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영국 전역에 이름을 알린 영웅이 되었다. 당적을 옮겨 다녔던 것도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그가 가진 개방성과 현실 인식의 결과였다. 정치 활동을 하면서는 연설가로서의 카리스마를 인정받아 국민적 주목을 받았다. 해군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직접 장교로서 프랑스 전선에 참전했다. 실제로 참호 속에서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독일군과의 교전도 치루었다. 전직 장관이자 상류층 정치인이었던 처칠이 책임 회피 대신 직접 전선으로 나갔다는 점은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불굴의 결의
기자 출신으로서 탁월한 글쓰기 능력을 지녔던 그는 여론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훗날 라디오를 통해 국민에게 희망을 전달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삶은 모험심 강한 군인과 종군기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는 지도자의 길을 거쳐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불굴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여정이었다.
승전국의 역사 속에서 바라보면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그가 라디오 앞에서 연설을 하던 당시 영국은 전 유럽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하던 시기다. 심지어 던케르트 철수 직후 간신히 살아 돌아온 패전의 순간에 서 있었다. 그야말로 암울한 시기였다. 그러나 처칠의 라디오 연설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시 방송이 아니라 영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 자유 진영에 저항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는 강력한 무기였다.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